
누군가는 일출을 보고 하루를 시작하고, 누군가는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간의 기준이 사라진 곳, 남극에서는 ‘아침’이라는 개념조차 인간이 정해야 한다. 해가 지지 않거나 뜨지 않는 땅, 외부의 소음도, 도시의 불빛도 없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루를 살아갈까? 남극 기지에서 보내는 하루는 단순히 생존이 아닌, 시간과의 협상이고,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치밀한 균형이다. 이 글에서는 그 특별한 하루의 시간표를 따라가며, 극지에서의 일상이 어떤 리듬으로 흘러가는지 하나씩 들여다본다.
아침이란 단어가 무색한 곳, 그럼에도 우리는 하루를 시작한다
남극에서의 하루는 시계가 있어도 감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면 빛과 어둠이 뒤집히고, 여름에는 밤이 없어지고, 겨울에는 아예 낮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그 탓에 이곳에서는 햇살로 하루를 시작하는 게 불가능하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의 차이는 창문 너머 풍경이 아닌, 알람 소리와 방 안 조명, 그리고 공용 식당에서 나는 따뜻한 커피 향이 대신 알려준다. 오전 7시, 남극 기지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된다. 눈이 오거나 기온이 뚝 떨어진 날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다. 모두가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에 모여 아침을 먹고, 같은 리듬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기지 내에서 시간표는 곧 생존을 위한 약속이다. 이 약속이 무너지면 생활 리듬도, 공동체의 질서도, 심리적인 안정도 무너질 수 있다. 기상 후에는 공용 식당으로 향한다. 아침 메뉴는 요일마다 다르지만, 늘 뜨겁고 충분한 열량을 제공한다. 계란, 소시지, 빵, 채소 스튜, 그리고 커피. 대화는 많지 않지만, 조용히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표정과 컨디션을 가늠하는 이 시간은 꽤 중요하다. 이곳에선 사소한 이상 징후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 8시 30분에는 데일리 브리핑이 열린다. 전원이 참석해야 하며, 여기서 오늘의 일정과 외부 날씨, 위험 요소, 장비 점검 내용이 공유된다. 누가 바깥 업무를 맡고, 누가 실내 실험을 할지, 어떤 장비는 오늘 점검을 받고, 어떤 구역은 출입이 금지되는지까지 모두 여기서 결정된다. 이 회의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다. 실시간 생존 계획이고, 인간들이 자연과 협상하며 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전략 회의다. 남극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된다. 빛은 없지만 규칙이 있고, 따뜻함은 없지만 연결이 있다. 햇살을 대신해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고, 서로의 일상이 하루를 만든다. 남극에서 아침이란, 몸이 깨어나는 순간이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과학보다 중요한 일상, 연구와 생존이 함께하는 낮
오전 9시. 데일리 브리핑이 끝나면 모두는 각자의 역할로 돌아간다. 누군가는 실험실로, 누군가는 발전기실로, 누군가는 기상 관측 장비가 설치된 언덕 위로 향한다. 남극에서는 연구가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상이 훨씬 더 중요하다. 기지 안에서 돌아가는 수많은 시스템—전력, 급수, 위생, 통신, 보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실험은커녕 생존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연구원도 기술자처럼 움직인다. 실험을 마치고 정비를 돕고, 물탱크에 문제가 생기면 직접 나가 수리하고, 식자재가 도착하는 날엔 모두가 함께 정리한다. 이 협업의 문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외부 작업이 예정된 날에는 하루가 더 일찍 시작된다. 기온, 풍속, 시계(visibility), 기기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야 출입 허가가 내려진다. 방한복을 껴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방설화를 신고, 얼굴은 마스크와 고글로 감싼다. GPS, 위성 무전기, 비상식량과 약품, 조난 시 신호탄까지 챙기고 나면, 기지 밖으로 나서는 데만 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나서야 바깥 세상, 다시 말해 영하 40도의 설원으로 나아간다. 이런 외부 활동은 1시간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날씨가 언제 바뀔지 모르고, 너무 오래 밖에 머물면 장비도, 사람도 고장이 나기 쉽다. 실험 목적을 잊지 않으면서도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이 원칙이다. 돌아오면 모든 장비는 바로 정리되고, 외부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고, 시료는 실온에 맞춰 안정화 과정을 거친다. 점심 식사는 오후 12시에서 1시 사이. 이 시간 역시 단체 활동이다. 단순히 에너지를 보충하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를 다시 이어주는 접점이 된다. 식사 중에 나누는 짧은 이야기들이 각자의 긴장을 풀어주고, 때론 정보 교환의 장이 되기도 한다. 오후에는 실내에서 실험 결과를 정리하거나 데이터를 정제하는 시간이 주어진다. 어떤 날은 외부와 화상 회의를 하거나, 새로 온 물품을 분류하기도 한다. 지루하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놀랍게도 이 단조로운 흐름이야말로 남극에서는 안정감을 주는 유일한 루틴이다. 반복 속에서 균형을 찾고, 균형 속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오후 5시 30분이 되면 공식적인 업무는 종료되지만, 개인의 역할은 여전히 남는다. 누군가는 저녁 준비를 도우며, 누군가는 야간 설비 점검에 대비한다. 남극의 낮은 이렇게 일과 생존이 엉켜 있는 시간이다. 과학적 성과와는 별개로, 이곳에선 살아남는 모든 순간이 ‘성과’다.
밤은 조용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해가 진 건지, 여전히 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시간. 저녁 6시가 되면 다시 식당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하루 동안 떨어져 있던 리듬이 이 식사 시간에 다시 모이고, 서로의 하루가 나눠진다. 식사 중에는 누구의 장비가 고장 났고, 어떤 실험이 흥미로웠는지, 바깥 바람이 얼마나 거셌는지 같은 이야기가 오간다. 웃기도 하고, 조용히 듣기만 하기도 하지만, 이 시간은 기지 사람들에게 중요한 정서적 연결 고리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언제고 틈을 타 들어올 수 있는 이 땅에서, 식사 자리의 조그마한 농담 하나가 하루를 버티게 한다. 저녁 식사 후에는 ‘자율 시간’이다. 그러나 그 시간마저도 규칙 안에서 존재한다. 공용 라운지에서 영화를 틀기도 하고, 조용히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가족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이들도 있다. 기지 내부에 마련된 작은 체력 단련실에서는 러닝머신이나 실내 자전거를 타는 소리도 들린다. 운동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남극에서는 체온 유지와 스트레스 해소, 생체 리듬 유지를 위한 필수 활동이다. 주말 저녁이면 소규모 모임이 열리기도 한다. 작은 파티, 게임 대회, 생일을 기념하는 깜짝 이벤트. 어떤 날은 모두가 어깨를 맞대고 영화를 보고, 어떤 날은 누군가 기타를 들고 와 노래를 부른다. 그 모든 순간들이 남극에서의 ‘밤’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하지만 이 평온한 시간에도 누군가는 일하고 있다. 야간 근무조는 전력 시스템을 감시하고, 발전기 연료를 체크하고, 기상 데이터가 정상적으로 기록되는지 확인한다. 어쩌면 단 한 번도 고장이 나지 않을 시스템이지만, 그걸 매일 확인하는 일이 곧 이곳의 안전을 보장한다. 자정 즈음이 되면 사람들은 하나둘 숙소로 향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 짧은 일기를 쓰거나, 가족사진을 들여다보거나, 창밖 어둠을 응시하며 하루를 정리한다. 밤은 조용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남극의 하루는, 그렇게 밤에도 살아있다.
남극의 하루는 시계가 만든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맞춘 리듬이 만든 시간이다. 낮이든 밤이든 해가 있든 없든, 중요한 건 그 안에서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지키고, 서로를 존중하며 하루를 쌓아 올린다는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 묻는다. 하루가 시작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해가 뜨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밥을 먹고, 같이 웃고, 서로의 안전을 걱정하며 같은 시간 안에 존재할 때, 비로소 하루는 시작되는 게 아닐까. 남극은 그렇게, 시계보다 사람의 호흡으로 하루를 만든다. 그리고 그 호흡은, 누구보다 인간적인 하루를 완성해간다.